정진우 회장님
한국 피아노계의 영원한 스승
한국 피아노계의 영원한 스승
정진우는 1928년 평양에서 정수영과 지수복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건반 악기를 처음 배우기 시작한 것은 다섯 살 무렵이었다. 집에 풍금이 있어 교회에서 배운 찬송가를 치기 시작했으며, 평양 남산소학교의 남궁요한나 선생으로부터 지도를 받기도 했다. 이후 평양사범학교와 평양 제일중학교에서 음악을 가리치던 아베 야스시 선생을 만나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1945년, 평양 제이중학교(구 평양고보) 졸업과 함께 아버님의 뜻에 따라 평양의학전문학교로 진학 후, 1946년 사선을 넘어 서울로 온 선생은 경성의학 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곧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으로 개편된 이곳에서 정진우는 의학공부를 하는 한편 음악가들과 교류를 시작한다. 성악가 서영모 선생과 서울합창단을 지휘하던 최희남 선생 등이었다. 본격적으로 전문 음악인의 반주자로 나서게 된 것이다. 이 시절 드는 평생지기 임진우와 김종은, 그리고 오현명을 만났다. 임진우와 김종은은 의대에 적을 두고 있으면서 음악을 하던 친구였고, 당시 서울대 음대 제1기생이었던 오현명은 그때 만나 성악가와 반주자로서의 동반자가 되었다.
육이오가 터졌다.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한국전쟁은 특히 그의 생애에 커다란 상처와 용기와 변화를 주었다. 적 치하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정진우는 군의관으로 자원 입대하여 전선으로 나간다. 그러다가 강원도 성지봉 전투에서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부대가 전멸한다. 추운 겨울, 포탄과 폭설 속에서 쫓기다가 발의 동상으로 족지부 절단 수술을 받은 후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그 후 정진우에게 두 번째 인생이 시작되었다. 육군병원에서 퇴원 명령을 받은 정진우는 1951년 육군 대위로 명예제대 특명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안병소 선생을 만나 음악가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 피난지 부산에서 첫 독주회를 갖게 된 것 이다. 1952년, 당시 부산 피난처의 이화여자대학교 강당에서 열렸다. 이후 그에게는 각 매스컴에서 ‘소생한 피아니스트'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의 이야기는 ‘절망은 없다'라는 제목으로 신문기사는 물론 드라마로 꾸며지기도 했다.
퇴원하고 1년 남짓 의원을 개업하기도 했던 정진우는 이 연주회를 계기로 이화여자대학교 강사로 강단에 서게 된다. 이후 서울대학교와 서울예술고등학교애서 가르치기도 했다. 이 무렵 정진우는 실험악회(서울실내악회 전신) 일로 자주 만났던 지휘자 임원식 선생의 조언을 받아들여 1957년에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유학을 떠난다. 비엔나 콘서바토리에서 한스 베버 교수를 사사한 정진우는 그로부터 기교도 기교지만, 무엇보다도 음악 열정을 배웠다고 술회했다.
공부를 마친 그는 1959년 현제명 선생을 만나 서울대 음대 전임강사로 교수 생활을 시작한다. 바이올린의 최명우, 첼로의 전봉초와 함께 ‘서울트리오’를 결성해 실내악 운동에도 앞장 섰다. 이때부터 그의 반생은 수 많은 제자를 가르치는 일에 매진하게 된다. 독주자로서는 물론 가곡 반주자로서, 특히 바리톤 오현명 선생과의 가곡 발굴과 우리 창작곡의 활성화를 기한 것은 업적 중의 업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가운데 그는 늦깎이로 의학 공부에 재 도전, 1973년 45세의 나이에 <일정한 음악이 정신과 환자에게 미치는 정서 반응>이라는 논문으로 가톨릭의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는다. 그리고 이순의 나이가 가까워서 그는 우리 음악계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다가
1982년 <피아노음악>이라는 음악전문잡지를 창간하게 된다. 이후 2002년에는 현악전문잡지 <스트링앤보우>도 창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월간 <파이노음악>은 현재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음악 전문지가 되었다. 한국 피아노 음악계의 큰 스승으로 평생 수 많은 제자들을 길러온 선생은 지난 2014년 예술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90세의 나이가 넘은 지금도 정진우 선생은 매일 구의동 스튜디오에 나가 악보와 음악 서적을 보며, 피아노를 치며, 또한 제자들과 만나며 음악을 연구하고 있다.
[참고문헌] <노래여, 노래여> 정진우 회고록 (㈜음연, 2008) 일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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